얼마 전 친한 홍보 담당자들과 모임이 있어 강남에 있는 식당을 찾았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홍보 담당자들이 자녀들에게 주로 입히는 패션 브랜드가 갭(GAP)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의아해하다가 의미를 알고 나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유인즉, 홍보 담당자 자신은 기자와 클라이언트 중간에 낀 을이나 병의 위치에서 일하고 있지만 자녀들은 커서 갑(GAP)이 돼라는 의미로 갭(GAP) 브랜드를 입힌다는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를 듣고 웃픈(?) 현실에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처럼 GAP을 비롯한 H&M, 유니클로 등 패스트패션을 선도하는 스파(SPA) 브랜드들은 최신 유행의 제품을 비교적 저렴하게 제공하여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눈높이가 갈수록 높아지고 동종업체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패션업계 전체의 경영실적도 악화되고 있다.
이처럼 어려운 경영 환경 가운데 유독 자라의 약진이 돋보인다. 자라의 모기업인 인디텍스는 2017년 1분기 순이익 6억 5,400만 유로를 기록하면서 전년 동기 대비 18% 상승하였다. 해외 주요 언론들은 자라의 상승세가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것 같다고 평가하면서 그 이유를 온라인과 오프라인 통합에 성공한 자라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전략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대부분의 패션업체들이 온라인 따로, 오프라인 따로라는 이른바 ‘따로 국밥’ 전략을 펼친다면 자라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하나로 합친 ‘세트 메뉴’를 선보이고 있는 셈이다.
속도 경영과 수평 문화로 디지털 리테일로 변신에 성공한 자라
모두 다 인정하듯이 패션 영역은 유독 유행에 민감한 산업이다. 패션 업계는 1년을 15개 시즌으로 구분할 정도로 유행에 민감하며 이런 유행에 대응하기 위해 적기 생산, 속도경영, 재고관리의 효율화가 필수다. 따라서 패션업계의 업의 본질은 어떻게 보면 디자인이나 브랜드가 아닌 물류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패션업계에서는 상품 수요를 예측하여 적기에 제품을 공급하고 최대한 재고가 쌓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자라는 어떻게 쟁쟁한 경쟁사들을 물리치고 세계 최고의 디지털 리테일러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기업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전략은 크게 리더십 역량과 디지털 역량으로 구분한다면 먼저 자라의 리더십 역량은 수평적인 문화와 업무에 대한 개인의 자율성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자라가 GAP이나 H&M과 다른 점은 디자인을 총괄하는 수석 디자이너(Chief Designer)가 없고 직급에 따른 계층구조가 없다는 점이다. 스페인 아르텍소(Arteixo)에서 근무하는 350명에 달하는 자라 디자이너들은 각각 제품 기획과 캠페인에 대한 독립적인 업무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수집된 데이터와 매장 매니저, 디렉터, 고객의 피드백 등 의견을 참고하여 신제품 개발에 반영하고 있다.
자라의 디지털 역량은 2005년 중반부터 시작됐다. 자라는 상품 수요 예측과 재고관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2005년 8월, 당시 MIT 슬론 경영 대학원의 Jérémie Gallien 교수(현재는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와 전 세계 매장의 판매와 재고 데이터를 분석하여 최고 매출을 달성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재고 최적 분배 시스템을 개발하였고 이를 통해 과학적인 분석을 통한 수요예측과 재고관리가 가능해졌다. 또한 패션업계 최초로 RFID 칩을 ZARA 매장에서 판매하는 모든 의류에 부착하여 도난방지와 재고관리, 실시간 판매 현황 집계가 가능해졌다. 현재 2천 개가 넘는 자라 매장 중 절반 이상이 RFID 기술을 활용하고 있고 향후 전체 매장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자라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전략
MIT대와 함께 개발한 ‘재고 최적 분배 시스템’이란?
자라의 신제품 실패율은 1%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경쟁 제품의 실패율이 17~20% 내외라는 사실을 따지면 놀라운 수치다. 자라가 이런 놀라운 실적을 기록하게 된 배경에는 데이터 기반의 수요예측 모델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자라는 일주일에 두 번씩 상품을 각 매장에 공급하고 있다. 이때 어떤 상품을 얼마나 공급해야 하는지를 수학적 알고리즘으로 결정한다. 알고리즘이 개발되기 전인 2006년까지는 매장 관리자가 물류창고에 각 제품과 사이즈를 요청하면 담당 팀에서 재고를 확인하고 출하량을 결정하였다. 매장 관리자 입장에서는 제품을 팔려면 매장 내 전시해야 할 제품이 일정 수량 이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제품 확보를 위해 본사에 수요보다 많은 제품을 주문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품을 많이 전시해도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매출은 제자리걸음이고 남은 제품은 떨이로 판매하거나 창고에 쌓아두어야 한다. 또한 제품 보유량은 적은데 고객이 많이 찾는다면 결국 잘못된 수요예측으로 고객이 떠나고 매출이 줄어드는 일이 발생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자라는 노출 효과가 발생하는 지점과 포화 효과가 나타나는 지점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 Jérémie Gallien 교수의 노출 및 포화효과 분석 이론
출처 : Zara uses operations research to reengineer its global distribution process, F Caro,
J Gallien, M Díaz, J García, JM Corredoira, Interfaces, 2010
자라는 2005년 8월부터 2년간 MIT Jérémie Gallien 교수팀과 함께 ‘노출 및 포화효과 분석 이론’을 통해 각 매장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체 개발한 알고리즘을 통해 어느 매장에 얼마만큼의 제품을 공급할 것인지 수학적 알고리즘을 통해 결정하게 하였다. 새로운 프로세스가 도입되면서 과거 판매 데이터와 각 매장의 주문량과 사이즈를 참고하여 예측 모델(Forecasting Model)이 수요예측을 하게 되고 이후 물류창고 담당 부서가 아닌 최적화 모델(Optimizing model)이 매장 내 재고와 물류창고 재고를 파악하여 전체 매출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출하 수량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새로운 프로세스를 도입한 결과 자라는2007년에서 2008년 사이 2억 3,300만 달러~3억 5,300만 달러에 달하는 추가 매출을 기록할 수 있었다.
▲기존 프로세스 vs. 신규 프로세스
출처 : Inventory Management of a Fast-Fashion Retail Network, Felipe Caro, Jérémie Gallien, 2010
자라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성공 키워드, ‘More Data, Fewer Bosses’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일하는 방식, 업무 프로세스를 넘어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까지도 변화시키고 있다. 자라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전략을 살펴보면 새로운 디지털 기술의 도입 차원을 넘어서서 재고 최적 분배 시스템과 RFID를 기반으로 시장 경쟁의 방식을 바꾸고 지속적인 경쟁우위를 통해 세계 최고의 디지털 리테일러 기업으로 진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자라의 모회사인 인디텍스 회장인 Pablo Isla는 자라의 이런 성공에 대해 “자라에는 스타 디자이너도 없고 스타 비즈니스맨도 없다. 이것저것 보스 대신 각자가 데이터를 참고하여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일한다. 우리에겐 고객과 시장에서 얻은 데이터가 있고 이를 기반으로 고객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패션 아이템을 제공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요즘 대한민국도 금융, 유통, 제조, 패션, 뷰티 등 전통 기업들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붐이 뜨겁다. 기업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오픈API, 블록체인 등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전에 우리 조직에서 가장 디지털화가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우리 기업에 맞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필요한 리더십 역량과 디지털 역량에 대한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고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소개
– 이승준 교수 / 現 경성대교수 , 비즈니스이노베이션그룹 대표, 투이컨설팅전문위원
비즈니스 모델 이노베이션 그룹(Business Model Innovation Group)은 관련 분야에서 2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박사급연구원들이 창립한 비즈니스 모델 혁신 교육 및 컨설팅 전문 회사입니다. 해외 주요 기업 및 스타트업의 비즈니스 모델 분석을 통해 국내 기업들의 비즈니스 모델 혁신 전략 수립에 필요한 컨설팅, 리서치, 교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